군데군데 물감이 잔뜩 묻은 느낌의 지친 목소리였다.
거세지는 빗소리속에 나는 서 있다. 증발해 버린 청춘의 수증기들이, 문득 비가 되어 이곳을 적시고 있는 느낌이다. 아직도 나는 그날의 눈 속에 서있고, 지금도 나는 그날의 눈을 맞고 있다. 그런, 기분이다. 떨어지는 빗방울의 수만큼이나 나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한다.
말을 쉬게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는 사람들만 가득했을 뿐 그 누구도 자신의 영혼을 기다려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영혼의 걸음은 생각보다 느리고, 세월은 내가 올라탄 말과도 같은 것임을
하지만 누구라도, 언젠가는 말을 세우고 자신이 달려온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인간에겐 결국 영혼이 필요하고, 영혼은 인디언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누구라도 그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가물가물하던 영혼의 빛 희미한 전구 속의, 끊어져가는 필라멘트와 같은 무언가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눈으로 확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인간의 안목은 그런 것이다. 죽음이 닥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다. 아, 그것이 사라졌구나 사라져가는구나 느낀 후에야 그 텅 빈 공백을 바라보며 비로소 중얼거릴 뿐이다.
바다가 보고싶어.
바다가 보고싶어.
종착역에 이를 때까지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인간처럼, 인생의 어느지점까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일부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날밤 우리가 바라보던 어둠 너머에는 또 어떤 앞날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인생은 늘 막연하면서도 확연한 안개와 같은 것이었다.
눈앞의 얼굴에 넘어간 인간도
눈앞의 실리를 쫓은 인간도
그런 인간의 눈앞에서
화풀이를 해야하는 인간도
모두가 시시하다고 생각이 든 것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는 세월을 걸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 까뮈 이방인
스스로가 빠트린.. 테이블 위를 굴러오는 공 하나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소릴 죽인 그녀의 미소와, 우리와 동행하던 바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이야.
사람의 웃음이 창처럼 사람의 배를 찌를 수 있다는 걸 믿으세요?
결국 세상의 매듭을 푸는 것은 시간이다.
너무 많은 말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단 한줄도 쓰지 못하셨을 거예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땐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게 인간이거든요. 아무런 애정이 없으니까 쉽게,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거예요.
여전히 달이, 자신의 이면을 감춘 채 하늘의 서편에 머물러 있는 새벽이었다. 인간은 끝끝내 자신의 이면을 감춘 채 사라지는 저 달과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인간은 대부분 자기와, 자신일 뿐이니까
나는 여전했지만 여전하지 않았고, 예전과 달리 주변의 속삭임에도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났다는 말은, 누군가의 몸 전체에 즉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린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버렸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뿌리에 붙은 흙처럼 딸려, 아니 떨어져나가는 마음 같은 것
무엇보다 나무가 서있던 그 자리의 뻥 뚫린 구멍과 텅 빈 화분처럼 껍데기만 남아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상상은 생각만으로도 아프고, 참담한 것이었다.
술래를 서다 돌아본 느낌의 그녀와, 왠지 작게만 느껴지던 그날의 우산이 생각난다. 나는 가능한 우산을 그녀쪽으로 밀었고, 그녀는 가능한 나와 거리를 두려 애쓰는 느낌이었다. 한 우산을 뒤집어 쓴 배려와 부끄러움이 발걸음을 조금씩 왼쪽으로 치우치게 만들었다. 미세한 기울기의 사선을 그으며. 또 가끔 서로의 자세를 수정해가며, 우리는 그렇게 광장을 가로질렀다. 우산을 벗어난 어깨가 젖는 것은 알았지만, 겨드랑이에 낀 책이 젖은 사실은 느끼지 못하던 밤이었다.
비를 상대하는 게 사람을 상대하는 거보단 쉬워요.
태양과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사랑을 할 수 있을거리고 생각했다.
세계라는 건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산다는 게 이런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되는 거라고.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이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고.
누군가 남기고 간 빈자리의 팝콘 처럼, 부풀긴 해도 식어있는 그의 이면을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 단지 그런 예감을 나는 할 수 있었다. 즉 우리 모두가 상처를 지닌 인간이란 것.
귀는 누군가의 입김이 빚어놓은 조각처럼, 어지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기관이었다.
손은 누군가의 손을 얹기위한 조각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기관이었다.
사막에서 마주친 작은 아이와 여우처럼, 이 가혹한 세계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 게 좋을 거야.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그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가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여우야. 어린왕자
오렌지 같던 태양
오후의 거리를 기억해요. 돋보기를 통과한 듯 쏟아지던 볕과, 이제 다시는 납득할 수 없을 여자로서의 나 자신과. 너무나 선명했던 그 그림자를 잊을 수 없어요. 돌아오던 먼 길과, 돌연 이 세상에 사라진 듯한 나 자신을 잊지 못해요. 자신보다 자신의 그림자가 더 아름다운 여자는 그림자로서 세상을 살아야해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요. 나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여자예요. 두려워요. 굳게 잠긴 그 방에 누군가 찾아온다는 것이. 들어 올 거 같다는 것이. 언젠가 문을 열게 된다면 이제 다시는 그 문을 닫을 수도, 잠글 수도 없다는 걸 느끼고 있는 거예요.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버려진 방을 가져야만 한다면 그래서 다시 그곳에 혼자 남게 된다면 세상의 빛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모든 걸 잠근 채 자신을 파묻은 삶은 살아갈 자신은 있어요. 하지만 모든 걸 열어둔 채 기다리고 잊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자신은 없는 거예요. 그 이후에 납득이란 것이 제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나는 눈을 감았고, 어둠 속의 어두운 길고 끝없는 계단의 어딘 가에서 꺼져가는 촛불을 든 채 서 있는 기분이었다.
영원한 장소도 영원한 인간도 없겠지만, 영원한 기억은 있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의 몫이야.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몰랐음으로 우리는 서로를 상상 할 수 있었고, 몰랐음으로 어떤 이득도 없는 한 마디 말. 작은 동작에도 그토록 쉽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겨울이었다.
그때의 아픈 마음과 저미던 가슴, 그리고 결국 폭력으로밖에는 해결할 도리가 없었던 나 자신의 시시함. 그런 세상의 시시함, 그런 인간의 시시함이 서러워 흘린 눈물들이었다.
크고 무거웠던 골목의 고요도 잊을 수 없다. 버려진 아기처럼 나는 그 문 앞에 서 있었고, 문득 이제 다시는 예전의 세계로 돌아 갈 수 없는 스스로를 느낄 수 있었다. 툭, 목련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냥. 그녀를 알던 사람으로 그 자리에 남겨진 사실을 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정지해 버린 느낌의 세상 속에서
함께한 시간동안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닮아가고 흡수하고 있었음을. 좋든 싫든.
해서 서로에게 서로가 남아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우리가 있다는, 그리고 우리에게 내가 있을 거란 그 사실이 조금은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가까스로, 그래서 외롭지 않은 여름이었고. 커다란 고아원처럼 느껴지던 텅 빈 마루에 누워 나는 비로소 내 속의 그녀를 향해 중얼거릴 수 있었다. 나도 잘 지내고 있어.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닮으려 애를쓰고 갖추려 기를 쓰는 여자애들을 보며 게다가 이것은 자기발전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외로움은 때로 인간을 관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리고 이 삶을 다수결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삶은 뭐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그런 기분이었다. 따라 뛰는 느낌. 끝없이 따라, 뛰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달리는 인간의 눈에 비친 서 있거나 걷는 인간의 시선 역시 이상하고 이상했을 거린 생각이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거야. 사랑 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거라고.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영리활동을 하면서도 사랑을 하는 기분, 사랑을 받는 기분 같은 걸 느끼고도 싶은 거야. 인간의 딜레마지. 그러니까 얘기해. 그렇게 살면되는 거라고. 남자들이 다 똑같은 게 아니라 함께, 똑같은 삶응 살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라고.
좀 더 그 아이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어도 좋았을 가을이었고, 좀더 밝게 세상을 보았어도 좋았을 가을이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지치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안간들이고, 어떤 면으로든 나 역시 외로웠거나 지쳐있었으며 그런 내 모습에서 잠시나마 그 애는 호기심을 느꼈던 게 아닐까.
인간은 기대를 걸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포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다. 신의 기대대로 살 순 없다 해도,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스스로의 기대를 져버릴 수 없는 동물이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한은 말이다.
인간의 추억은 열어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물이 담겨 있는 녹슨 상자와 같은 것이다.
내가 간직한 추억이란 이름의 상자는 언제나 어김없이 그날 밤의 헤어짐을 끝으로 굳게 뚜껑이 닫힌다. 더는 열 수 없는 상자가 되는 것이고, 열어봤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상자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시각으로 남을 비하할 수 없다는 게 상식인 사회라는 거죠. 사회의 가치는 그런 거라고 생긱해요. 동등한 기회를 얻고, 그 대가를 바랄 수 있는. 그리고 노력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저는 이 곳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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