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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참을 수 없은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테라

by 초이조무 2021.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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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삶의 최고 가치는 모성애이고 모성애란 큰 희생이라고 믿었다. 모성애가 희생 그 자체라면, 태어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 셈이다.

꿈들은 웅변적일 뿐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꿈은 커뮤니케이션일 뿐 아니라 미학적 활동, 상상력의 유희이며, 이 유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다.

그녀의 삶은 둘로 갈려있었다.
밤과 낮이 서로 그녀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한 계기로 돌연 자신의 무력함이 드러났고 이 무력감으로부터 현기증, 엄청난 추락 욕구가 생긴 것이다.

개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게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시간의 흐름도 하나가 지나면 다음 것으로 가는, 점점 말리 앞으로 가는 쉼 없는 운동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은 손목시계 바늘 처럼 원운동을 했다. 시계바늘 역시도 미친 듯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궤도를 따라 하루하루 시계 판 위에서 원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짓을 저지르고 싶었다. 그것은 현기증이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극복할 수 없는 추락 욕구.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 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주 대로에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 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실수에 의한 아름다움

내가 말한 모든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관념에 불과하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Es muss sein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라 '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 즉 신중하게 저울질한 결정이 된 것이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그러니까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불완전한 초고 형태로서) 형이상학적 진리였지만 끝에 가서 (완성된 작품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농담이었을 수도 있었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싶다는 깊은 욕망이 있었다. 그것을 작정하는 데에는 일초도 걸리지 않았다.
Es muss sein은 내면적 필연성이었던 반면, 그때 그것은 사회적 관습이 개입한 외부적 es muss sein과 관련 있다.
내면의 명령은 더욱 강렬하고 그래서 더욱 강하게 반항을 불어일으키기 때문이다.
es muss sein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고 싶은 욕망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았는지 보고 싶은 욕망

자신이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 일을 했고 그것이 아름답다 생각했다.

뇌 속에는 사적 기억이라 일컬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지대가 존재해서 우리를 매료하고, 감동시키고, 우리의 삶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기록되는 모양이다.

나는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 행복 없는 쾌락은 쾌락이 아니야.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 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확인 할 수 없다.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하나뿐이다. 그의 인생처럼 그 역시 두 번째 수정기회 없이 어느 날 완료 될 것이다.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는 개인의 삶 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갓이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저주와 특권, 행운과 불운, 사람들은 이런 대립이 얼마나 서로 교체 가능한지를, 인간 존재에 있어서 양극단 간의 폭이 얼마나 좁은지를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네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째 익명의 무수한 시선,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시선을 추구한다. 이들은 대중을 잃으면 그들 인생의 무대에 불이 꺼졌다고 상상한다.
둘 째 다수의 친한 사람들의 시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속한다. 언제나 어떤 시선을 획득하는데 첫째 범주의 사람들 보다는 행복하다.
셋 째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위험천만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감기면 무대는 칠흑에 빠질 것이다.
넷 째 아주 드문 범주이다.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몽상가이다.

천국의 삶은 우리를 미지로 끌고 가는 직선 경주와는 동떨어졌다. 그것은 모험이 아닌 셈이다. 그 단조로움은 권태가 아니라 행복이다.

만약 우리가 사랑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봐, 매일 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걸 찾아 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냐는 사과나무 사이에 이런 비문이 새겨진 묘비를 상상했다. '여기에 카레닌이 쉬고 있다. 그는 작은 크루아상 두 개와 벌 한마리를 낳았다.'
정원의 어둠이 짙어 갔다. 밤도, 낮도 아니었고, 하늘에는 죽은 자의 방에 켜진 채 잊힌 램프 같은 창백한 달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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